⑬산사의 밤은 적막

2020.11.27 표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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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의 밤은 적막



 



낮에는 많은 방문객들로 표충사 마당은 북적거린다. 주말과 일요일에는 마당에 사람들로 가득하다가도 밤이 되면 산사는 그야말로 적막강산이 되고 만다. 저녁을 먹고 저녁 예불이 끝나면, 표충사 마당은 고요한 적막 속에 휩싸인다. 사내 대중들도 다들 방에 들어가고 나면, 나는 마당 한 가운데에서 사방을 둘러보고, 경내도 한 바퀴 둘러본다. 경내의 이곳저곳 그리고 전각을 둘러보면서, 상념에 잠긴다. 신라 고려 시대에는 한반도 전역에는 사찰과 스님들로 만원을 이루었을 테고, 절마다 주야로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을 것으로 상상이 간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다소 박해를 받아서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때 불교는 국교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고, 왕실에서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면 수 만 명이 운집할 정도로 만발공양은 절정을 이뤘다고 기록은 전한다. 고려시대에 불교가 왕성하게 발전하고 스님들이 다소 호화롭게 생활하다보니 유생들은 좋지 않는 눈으로 봤을 테고 상소를 올려서 불교를 자꾸 비난했던 것 같다. 조선조는 성종 시대에 이르면 불교를 본격적으로 탄압하고 억압하는 정책을 노골적으로 썼는데, 이후부터 불교는 차츰차츰 힘든 시련을 겪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이런 결과로 조선 중후기에 오면 불교는 그야말로 맥을 못추는 입장이 되고 만다. 그래도 표충사는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시는 호국사찰이 되면서 다른 사찰에 비해서 사정은 조금 나아진 것으로 사료된다.          



 




사진1: 2016년 제 546회 사명대사 추계향사에 지방 유림 대표들이 예복을 입고 참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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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덕택에 표충사는 빈곤은 면할 수가 있었고, 그나마 대중들이 다른 사찰에 비해서는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다른 사찰보다는 유생들의 비난을 덜 받았던 사찰이기도 했다. 구국의 성사이신 사명대사의 공적 때문이었다. 가사와 석장을 벗어놓고, 방할(棒喝)로써 왜군의 심장에 뇌성벽력 같은 기상으로 일침을 가했기에, 왜장도 사명대사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던 것이다. 당대에 유생들도 사명대사에게는 감히 대들 수 없는 상황이었고, 호국성사이신 사명대사는 위엄과 풍모가 뛰어났던 분이었다. 사명대사가 아니었다면 표충사는 존재의의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사진2: 표충사 선방 서래각 마루에서 찍은 종무소와 요사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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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면 가끔 마당에 나와서 거닐어본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산사의 정취를 느끼면서 표충사의 역사를 복기해 보면서, 표충사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설계를 구상해 본다. 가장 시급한 것이 대중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용도인데, 해우소 사정이 좋지 않아서 오자마자 공사를 단행했다. 옛날에는 사중스님들이 전부 한 방에서 생활하다시피 했다. 특히 공부하는 학인들은 대중 방에서 함께 공부하고 함께 자면서 이 대중 방에서 공양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했고, 스님들도 개인 사생활이 있기에 보장해 줘야 한다. 남방불교 같은 데에 가보면, 비구들에게 전부 방 하나씩을 주면서 기거하도록 하는데, 매우 합리적인 것 같았다. 인도에서도 비구들에게 쿠티라고 해서 개인 방을 제공했던 것으로 안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다든지 어떤 아식을 집행할 때는 큰 홀에 모여서 함께 하지만 평소에는 개인의 쿠티를 존중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한국의 사찰들은 거의가 산중에 위치하고 있어서 밤이 되면 적막하기가 그지없는데, 조석예불 할 때,  행선축원문에도 이런 구절이 있다.     



 



“산문숙정절비우(山門肅靜節悲優:산문은 고요하여 슬픈 근심 끊어지고)

사내재앙영소멸(寺內災殃永消滅:도량안의 모든 재앙 영원히 소멸되며)“



 



재약산인: 도원 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