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사명대사의 출가

2020.11.27 표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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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의 출가


사명대사의 법명은 유정(惟政)이다.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四溟).종봉(鍾峯).송운(松雲_ 등이다. 사명대사는 1544년 밀양군 무안면 고라리에서 출생했다. 속가의 성은 풍천 임씨(任氏)며 증조부 효곤(孝昆)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삼품인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이르렀다고 한다. 증조부가 대구 부사를 지내서 밀양으로 이사했다고 전하는데 아마도 그 이전에는 서울에서 살았던 것 같다. 대사는 비문에 의하면 13세에 황악산 유촌 황여현에게 가서 《맹자》를 배웠다. 그 후에 직지사에 들어가서 신묵(信黙)화상에게 삭발하고 《전등록》을 배워 불교 특히 선불교의 심오한 오의(奧義)를 요해(了解)했다고 한다. 


사진1: 무안면에 있는 표충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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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의 생가 터인 밀양에 세워진 〈표충사적비>에 의하면 “대사가 전란을 평정하고 돌아와 산 동쪽 기슭에 초옥 수간을 지어 살 곳으로 삼아 백하(白霞)라는 현판을 걸고, 선영이 가까우므로 늙은 창두 종생과 말생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라고 한다. 그리고 조부모와 부모묘소는 그 후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관리되고 있다. 이와 같이 대사는 가문이 영락하여 출가를 하게 되었고, 선영을 지킬 사람이 없어서 자신이 건립했던 백하암은 조선 후기에 와서 표충사(表忠祠)로 변하였다가 다시 표충사(表忠寺)로 이건(移建)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명대사는 출가한 후에,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다 섭렵하고 중국 한국의 선서(禪書) 또한 보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독파했다고 한다. 1561년 18세 시에는 선과(禪科)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했다. 우리나라에서 승과가 처음 실시된 것은 고려 광종 때인데, 고려 광종 9년 958년에 관리 등용의 한 방책으로서 진사과(進士科)와 명경과(明經科)를 주축으로 하는 과거제를 창설했을 때 승과제도도 함께 마련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승과에는 불교 자체 내에서 교종과 선종의 두 갈래가 있었던 만큼, 교종의 승려를 선발하는 교종선과 선종의 승려를 선발하는 선종선의 두 종류가 있었다. 교종선은 교종의 도회소(都會所)인 개성의 왕륜사(王輪寺)에서, 그리고 선종선은 선종의 도회소인 개성의 광명사(廣明寺)에서 각각 실시하였다.


승과 합격자에게는 교종·선종의 구별없이 대선(大選)이라는 법계(法階:승려들에게 주어지는 품계)가 주어졌다. 이 대선을 시발로 하여 대덕(大德)·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의 순으로 승진할 수가 있었다. 그 위로 교종계에서는 수좌(首座)·승통(僧統), 선종계에서는 선사(禪師)·대선사(大禪師)의 법계가 있었다. 승통 또는 대선사에서 다시 오를 수 있는 지위는 국사(國師)·왕사(王師)였는데 여기에는 교종·선종의 구별이 없었다. 이는 승려가 국가로부터 받는 최고의 영예직이었다고 하겠다. 고려시대 승과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교종선과 선종선으로 나뉘어 3년마다 실시되었다. ≪경국대전≫ 예전(禮典) 도승조(度僧條)에 “선교양종이 3년마다 시험을 실시하되 선종에서는 ≪전등록 傳燈錄≫과 ≪염송 拈頌≫을, 교종에서는 ≪화엄경≫과 ≪십지경론 十地經論≫을 시험해 각각 30인을 뽑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승과(조선시대에는 승과를 일반적으로 禪科라고도 하였음.)에 합격하면 선·교의 구별 없이 대선의 법계를 받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중덕(中德)을 거쳐 교종에서는 대덕·대사로, 선종에서는 선사·대선사로 각각 올라가게 되었다. 그러나 억불숭유정책(抑佛崇儒政策)이 강화됨에 따라 성종·연산군 치하에서 승과는 일시 중단되었고 중종 때에는 폐지되었다. 그것은 당시 선·교양종을 주축으로 하던 불교 자체에 대한 철저한 탄압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불교가 가장 시련을 받는 기간이라고 할 것이다. 그 뒤 승과는 1550년(명종 5)에 복구되었다. 즉, 이 해에 명종은 선교양종의 본사(本寺)를 부흥시켜 선종은 광주(廣州:지금은 서울의 일부)의 봉은사(奉恩寺)를, 교종은 양주(楊州)의 봉선사(奉先寺)를 각각 본사로 삼고 아울러 3년에 한번 씩 승과를 실시할 것을 공포하였다.


사진2: 승과를 부활시킨 조선시대의 보우 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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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조처에 조정 신하들은 물론, 성균관 및 그 밖의 유생들이 즉각적으로 들고일어나 복립양종선과사(復立兩宗禪科事)의 철회를 강력히 그리고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불교를 독신하던 중종의 비요 명종의 생모인 윤대비(尹大妃)가 정무를 독단하던 때였고, 또 보우(普雨)가 조정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서 승과는 그대로 시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565년 윤대비의 사망을 계기로 보우는 유배, 장살(杖殺)되고 양종과 승과 및 도첩제(度牒制)가 모두 폐지되었다. 임진왜란 중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 서산대사 휴정(休靜)이나 사명당 유정(惟政)은 다 위의 복구된 승과에 합격한 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승과가 언제 다시 복구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임진왜란 중에는 권시토적지술(權時討賊之術), 즉 토적을 위한 임시방편으로 참급자(斬級者)에게 급선과(給禪科), 즉 승과합격증을 주는 정책을 몇 차례 실시하였다. 그리고 이에 관한 지침으로 선과사목(禪科事目)이라는 것을 반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승과에 관한 ≪경국대전≫의 규정은 조선 말기까지 변동 없이 그대로 존속되었다고 하나 실제 시행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데 실제로는 승과 실시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가 전하는 것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승과에 대한 역사이다. 


아무튼 사명대사는 조선시대 없어졌다가 다시 복구된 승과에서 장원급제할 정도로 선교양종에 뛰어난 실력을 갖춘 분이어서 불교에 대한 식견이 어느 정도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사명대사는 승병 대장으로서 왜적을 물리친 의승병장으로만 알지만, 사명대사는 선교에 밝은 정안종사(正眼宗師)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명대사는 1573년 30세 때, 직지사 주지로 있으면서 허응당 보우의 문집과 잡저의 간행에 발문을 쓰고, 교정을 보았다고 한다. 이 무렵 출가 이후 처음으로 고향 밀양을 찾아 선영에 배알하였다 한다.


재약산인: 도원 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