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 사명대사와 전쟁

2020.11.27 표충사
0 204


사명대사와 전쟁


사명대사는 오대산 월정사에 머무를 때 두 번 큰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한다. 우리는 사명대사가 순수한 선사로서 사판 일에는 등한시 한 것 같지만, 그는 월정사법당을 개보수하기도 했다. 조용히 수도만 하던 사명대사에게도 운명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듣자하니 금강산 유점사에 일본군이 침입하여 승려들을 결박하고 보물을 강요했다는 전갈이 날아들었다. 사명대사는 유점사로 향했다. 유점사에 이르러서는 태연하게 대웅전으로 들어가서 일본군 대장과 필담으로 담판을 벌였다. 불교의 자비를 설파하면서, 위엄을 보이자. 왜장은 순순히 물러서면서, 팻말에 “이 절에는 도승이 있으니 다시는 들어오자 말라.”라고 게시했다고 한다. 


사진1: 금강산 유점사 대웅전.




14dowon01.jpg


14dowon01.jpg (83.75 KiB) 8 번째 조회



사명대사는 며칠 뒤에 왜군의 주둔 본부가 있는 고성으로 내려가서 적장에게“ 인명을 해하지 말라.”라고 설득하니, 그들은 계를 받들고 3일 동안 예우한 뒤 전송하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왜적이 계속 침탈한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건봉사에 승병 150명을 모아 춘천으로 출병하려던 차에, 서산대사로부터 근왕(勤王=임금이나 왕실을 위하여 충성을 다함)의 격문이 당도하였다. 격문을 받고 평양 교외에 도착하였고, 도체찰사(조선 시대에, 전쟁이 났을 때 군무를 맡아보던 최고의 군직軍職) 서애 유성룡과 8도총섭(임진왜란 때에, 선조가 휴정 대사에게 내린 벼슬. 팔도 16종(宗) 도총섭으로 전국 의승군(義僧軍)을 통솔하였다.)서산대사의 휘하에서 대사는 의승도 대장에 임명되어 2천 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평양성에 있던 왜군을 교란하면서 후방과의 연락을 차단시켜 차질을 빗게 했다.


사진2: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6월 13일 평양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전투.




14dowon02.jpg


14dowon02.jpg (42.1 KiB) 8 번째 조회



1593년(50세)초에는 조선과 중국 명나라 연합군은 평양성을 공격, 탈환하였다. 사명대사가 이끌었던 의승군의 활약은 조선관군과 명나라 이여송의 원군들을 도와서 전과를 올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군은 퇴각하는 왜군을 한양(서울) 수락산 승첩을 거두어 사명대사는 선교종판사(禪敎宗判事=조선 때, 선종(禪宗)과 교종의 최고 지위로서 요즘 같으면 총무원장이나 종정)에 오르고 이어 당상관(조선시대 관리 중에서 문신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무신은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상의 품계를 가진 자)이 되었다. 통정대부는 정3품의 상계(上階)로서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절충장군은 조선시대 정삼품(正三品) 서반(西班) 무관(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정삼품의 상계(上階)로서 어모장군(禦侮將軍)보다 상위 자리로 당상관(堂上官)의 말미이다. 정삼품 위로는 문산계의 동반 품계를 받았다. 이처럼 사명대사는 불교계 뿐 아니라 조선관직에 있어서도 상당한 고위직에 오른 것이다. 


1594년(51세) 4월 명나라 심유경과 왜장 소서행장의 협상루트와는 별도로 대사는 왜장 가등청정과 풍신수길을 이간시키려는 계책의 주역을 맡게 되었다. 이 때 처음으로 송운이라는 법명을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송운(사명대사)은 가등청정과 회담을 진행했는데, 적장의 진영에 들어 다니면서 이 내용은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에 수록되어 있다. 


사진3: 분충서란록 조선 중기의 승려 유정이 지은 임진왜란 때의 사적. 

1739년(영조 15) 밀양 표충사에서 개판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4dowon03.jpg


14dowon03.jpg (74.69 KiB) 8 번째 조회



사명대사는 그해 7월 6일 청정과의 두 번째 회담에서 일본이 요구하는 영토 할양과 인질문제 등은 전혀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 때 청정은 송운 대사에게 묻기를 조선의 보배는 무엇인가? 라고 묻자, “그대의 목이 우리의 보배”라고 답했다는 이야기는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호쾌한 사자후였다. 여기서 일일이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사명대사는 1595(52세)에는 <을미년에 상소하여 시사를 말하다>라는 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밖에도 사명대사는 약견산성과 용기산성을 완성시켰고, 겨울에는 대구 팔공산성의 수축에 착수하니 체찰사 이원익은 대사의 승도들이 축성한 공을 높이 칭찬하였다. 가을에 명나라 책봉부사 양방형의 내방을 받고 시로써 위로하기도 했다고 한다. 사명대사는 허균과도 친했다고 한다. 허균(許筠, 1569~1618)은 당대 명가의 후예로, 자유분방한 삶과 파격적인 학문을 했던 인물이었는데, 굴곡 있는 삶을 살았던 정치인이자, 자기 꿈의 실현을 바라던 호민을 그리워하던 사상가였다. 허균은 분명 시대의 이단아였지만, 《홍길동전》을 지은 최초의 한글 소설가이기도 하다. 《홍길동전》은 허균의 생애와 사고를 응축해 놓은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재약산인: 도원 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