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송운대사분충서난록》은 어떤 책?

2020.11.27 표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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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운대사분충서난록》은 어떤 책?

 



표충사 주지 소임을 보다보니, 자연스럽게 사명대사에 대한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절실해서 공부 아닌 공부를 하고 있다. 이제 사명대사의 전모를 어느 정도 파악해 가면서 《송운대사분충서난록》을 읽고 있다. 이 책은 사명당 송운대사 유정(1544〜1610)이 임진왜란 중에 왜장 가등청정과 여러 차례에 행한 외교 회담을 정리한 일기체 형식의 기록이다. 적진을 드나들면서 보고들은 보고와 조정에 올린 상소문도 함께 수록되어 있는 책이다. 이 자료들은 사명대사가 입적하고 나서 백여 년이 지난 다음, 1739년에 표충사에서 간행되었다. 당시의 문장가인 신유한이 발문을 썼다. 신유한은 이 책의 편찬자로서 대사의 문장과 글들에 대해서 평어(評語)를 붙이고 자기의 견해까지 곁들여서 읽는 이들로 하여금 이해를 돕고 있다.  



사진1:《송운대사분충서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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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엮은이는 조선시대 신유한(申維翰)이란 분이다. 신유한의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주백(周伯), 호는 청천(靑泉). 출생지는 경상도 밀양, 거주지는 경상도 고령. 증조가 신구년(申龜年)이고, 아버지는 신태래(申泰來)이며, 어머니는 김석현(金碩玄)의 딸이다. 신태시(申泰始)에게 입양되었다. 1705년(숙종 31) 진사시에 합격하고, 17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19년 제술관(製述官)으로서 통신사 홍치중(洪致中)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며, 봉상시첨정에 이르렀다.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특히 시에 걸작품이 많고 사(詞)에도 능하였다. 최두기(崔杜機)와 친하였다. 저서로는 《해유록》 《청천집》 《충서난록(奮忠難錄)》 등이 있다. < 이상현 옮김> 

이상이 신유한의 간단한 이력이다. 밀양에는 그의 문손들이 있고, 누구보다도 사명대사에 관심이 많은 것은 그 분들의 선조가 이 책을 편찬했기 때문이다. <분충서난록 소서>는 긍재 병옹이 썼는데, 한번 소개해 보자.



 



지난 6월에 영남 밀주(밀양)의 승려로서, 고 송운대사의 법손인 남붕(南鵬)이 글을 보내어 하나의 문자를 청하였는데, 그때 나는 병이 심해서 답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5개월이 지난 동짓날에 남붕이 또 내 집을 찾아와서는 소매 속에서 두 책을 꺼내어 보여 주었는데, 하나는 송운 대사의 《분충서난록》이었고, 하나는 《표충사제영록 表忠祠題詠錄》이었다. 이 글들을 펼쳐 놓고 거듭 읽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차탄(嗟歎=탄식하고 한탄)하였다. 

지금 남붕이 지성으로 애쓰는 것은 반드시 오래도록 전할 목적으로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이다. 그가 이처럼 열심히 하니 장차 귀신이 보호하는 가운데 자운과 해월 사이에 은밀히 보관되어 억겁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 이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기에 그가 떠나매 애오라지 이렇게 써서 주게 되었다. 

내가 구구하게 글로 기록한다 한들 대사의 경중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가 없을 것인데, 더군다나 한 시대의 거장 명인들과 학사 문인들이 가영(歌詠)하고 찬술하여 거의 빠짐없이 상세하게 드러내었음에야, 나를 돌아보면 병들고 졸렬하기만 하니, 어찌 여기에 또 군더더기 말을 덧붙이겠는가.    

지금 남붕이 지성으로 애쓰는 것은 반드시 오래도록 전할 목적으로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이다. 그가 이처럼 열심히 하니 장차 귀신이 보호하는 가운데 자운과 해월 사이에 은밀히 보관되어 억겁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 이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기에 그가 떠나매 애오라지 이렇게 써서 주게 되었다.



 



기미년(1739, 영조 15) 12월 상순에 긍재 병옹은 쓰다(함원 부원군 어유귀 魚有龜)


사진2: 그림으로 본 조선통신사 행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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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한(申維翰)은 《송운대사분충서난록》을 편찬하기도 했지만, 《해유록(海游錄)》이란 유명한 책이 있는데, 원제목은 《해사동유록(海槎東遊錄)》이다. 기행문학의 백미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비견할 만한 커다란 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해유록》은 18세기 전반 조·일 관계 및 서방세계로 향한 대외 인식은 물론, 타문화에 대한 저자의 독특한 문학적 감수성을 잘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신유한의 일본 파견은 조선 후기인 1719년, 제9차 통신사가 파견되었던 때이다. 그 전 해인 1718년에 새로 장군직을 맡은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습직을 도쿠가와 바쿠후가 통보하면서 축하 사절로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해왔다. 조선 조정은 많은 논란 끝에 파견을 결정하게 된다. 당시 신유한은 제술관이라는 직책으로 통신사 일행의 문사에 관한 것을 주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문사들과 교류를 담당하는, 말하자면 문화교류를 위한 총책임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가 일본에 체류한 약 10여 개월에 이르는 동안 일어난 일들을 일기체 형식으로 엮은 것이 《해유록》이다.



 



재약산인: 도원 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