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임진왜란과 사명대사

2020.11.27 표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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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사명대사




임진왜란은 조용한 은자(신선)의 나라를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다. 산 좋고 물 좋은 삼천리금수강산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던 조선과 백성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이 세상에 태평성대란 없는 것일까. 태평성대만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마는, 세상사는 그렇게 생각대로만 되지 않는 것이 또한 사바세계의 본분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의 성이 바뀐 지도 150년이 지날 즈음, 조선은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와는 거리가 먼 성리학이 체계를 잡아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양반들은 장죽을 입에 물고 공맹의 도리를 논하면서 당파 싸움 또한 막이 오르는 시기였다. 이런 조선을 일본은 간파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미 서양과 통상을 할 정도로 항구를 열고 국제정세에도 너무나 밝았다. 틈틈이 조선반도의 해안을 염탐하고 내륙에 까지도 정세를 알고 있던 일본은 정한론(征韓論)이 힘을 받았다. 이러던 차에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은 일본을 통일한 여세를 몰아서 조선침략의 흉계를 꾸미게 된 것이다. 이른바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7년 전쟁이다.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임진란, 임란이라고도 부른다. 두 번의 침입이 있어서 제2차 침략은 정유재란이라 따로 부르기도 한다.



 




사진1: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는 임진왜란 당시의 격전

       장면을 동래부 화원이었던 변박이 그린 기록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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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는 개국 후 100여 년간 창업을 주도 했다. 자연스럽게 조정은 개국공신과 왕조의 후손들로 구성된 훈구파가 존재하게 되어, 그 부패가 극에 달했다. 이때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사림파 세력 또한 등장하게 되었다. 사림파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치, 사회질서 재정립을 강조하면서 전반적인 국가 통치 질서를 재정립하려고 나섰다. 그 결과 신진 사림 세력과 기존 훈구파 세력은 마찰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두 세력의 대립은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려고 사림들을 삼사의 요직에 등용하여 더욱 불거졌다. 그 결과로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에 이르는 근 반세기간에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네 차례에 걸친 사화가 일어나 사림파 신진 세력들은 크게 타격을 받았고 정국은 큰 혼란을 겪었다. 이 영향으로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나 신분 제도와 군역 제도가 무너져 권문세도가가 농장을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공납 제도도 문란해지는 등 사회 전반이 동요하는 기미를 보였다. 사림파 집권 이후 정권은 동인과 서인 양대 세력으로 분열되어 대립을 거듭하였으며, 때문에 국정에 들인 노력보다 얻는 결과가 매우 적었다.



 




사진2; 동래성 전투를 그린 동래부 순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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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차 쓰시마 국주를 이용하여 조선에 교섭을 청하였는데, 그들은 명나라와 사대외교를 하고 싶어 하였다. 이에 조선의 조정에서는 오랜 논의 끝에 1590년(선조 23년)에 일본의 요구에 대한 응대와 더불어 일본내의 실정과 히데요시의 저의를 살피고자 황윤길을 통신사로, 김성일을 부사로, 그리고 허성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했다. 여기서 자세한 전말을 더 이상 전개하기에는 지면의 제약이 있지만, 일보내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는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소 요시토시, 고니시 유키나가, 다테 마사무네,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상당수의 다이묘들이 조선으로 군사를 내는 것에 반대 하였으나, 히데요시는 여러 다이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진을 강행했다. 이에야스는 풍토병과 황무지 개간 및 지배 지역의 치안 문제 등, 갖은 변명을 둘러대며 기어이 불참하였고, 자신의 군대를 온전히 보존시켰다. 사실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에게만은 임진왜란 출전을 강요할 수 없었던 까닭은 그가 자신과 맞상대가 가능한 세력이란 걸 의식했기 때문이다. 또 히데요시가 조선에 직접 출병하지 못하고 자기 수하만 보낸 까닭도 여기에 있다. 비록 일본 제일의 실력자가 되었다고는 하나 히데요시 자신이 자리를 비운다면 일본 국내 정세가 어떻게 돌아갈지 스스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차제에 사명대사가 등장한다. 전쟁을 일으킨 자가 있으면 멈추고자 하는 세력이나 인물이 있게 마련이다. 사명대사가 일본에 강화사로 갈 무렵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힘을 얻고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야기는 차회에 더 전개하기로 하자.

 



재약산인: 도원 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