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 승군의 활약

2020.11.27 표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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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군의 활약




사진1: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모습을 묘사한 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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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간의 임진왜란은 정말 지옥 같은 일이었으리라.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로 몰아간다. 태평성가를 부르던 조선민족에게는 뜻하지 않은 날벼락이었다. 미처 대처하지 못하던 조정에서는 좌왕우왕 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조선은 병농일치의 군사제도를 시행하였으므로 의병부대를 국가의 정식 군대로 인정하였다. 의병들은 곳곳에서 일본군의 보급로와 통신망을 차단하여 일본군을 곤란에 빠뜨렸다. 의병의 봉기로 민심은 차츰 제자리를 찾게 되었으며 조선 관군도 재기할 시간을 벌었다. 1592년 또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압도하는 화력과 탁월한 전술을 이용하여 일본 수군을 음력 5월 사천 해전에서, 음력 6월 당포 해전에서, 음력 7월 한산도 대첩에서 패퇴시키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일본군은 보충 병력과 군수품 수송이 어려워져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명(明)에서 온 원군의 활약과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동은 조선에 불리하였던 전세를 소강(小康)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때 명나라와 함께 조선에 파병돼 일본군과 싸운 포르투갈 용병들이 있었다. 포르투갈의 선진화된 문물을 갖춘 용병을 '해귀'(海鬼)라 불렀다. 명나라가 고용한 포르투갈의 용병들이었다.



 



한편 국내 각처에서는 일본군의 침공에 대항하는 의병이 일어났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에서 일어나 청주에 주둔한 일본군과 전투하고 금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고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하여 의령과 창녕에서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고 진주에서 김시민과 함께 일본군을 방어하였다.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하여 은진까지 북상하였다가 금산성에서 일본군과 격전하다가 전사했으며, 김천일은 호남에서 거병하여 수원을 근거지로 일본군과 전투하고 강화도로 진을 옮겼다가 다음 해 진주에서 전사하였다.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과 길주를 회복하고 일본군을 몰아내어 함경도를 수복하였다. 묘향산에 주석하던 서산대사 휴정은 격문을 팔도 승려에게 보내 그 사람의 제자 유정의 내원을 얻어 승병 1700명을 이끌고 평양 탈환전에 참여해 공을 세워 도총섭에 임명되었으며, 서산의 제자 처영도 승병을 모집하여 전라도에서 권율의 막하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이상은 임진란 때, 일본군에 반격을 가한 간략한 스토리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이 서산대사 사명대사 기허대사와  뇌묵스님 등이다. 



 



우리는 임진왜란 때의 대표적인 승병장으로는 휴정·유정·영규·처영만을 기억하지만 이외에도 ⪡선조실록⪢에 따르면 많은 승려들의 기록이 있다. 무기를 만들고 성을 쌓는 데 공이 컸던 법견(法堅), 정보를 담당했던 행사(行思), 죽산성을 쌓았고 그 성의 수비대장을 겸했던 영주(靈珠), 담양옥천사에서 봉기한 인준(引俊), 용진의 월계산성(月溪山城) 수축의 책임을 맡았던 견우(見牛), 경상도에서 봉기하여 전공을 많이 세운 해안(海眼) 스님 등이 있다.



 



자료에 의하면 서산대사의 부상으로 평양탈환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인오(印悟)와 천연(天淵), 평안도·황해도 일대의 수비대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법정(法正), 여천 일대의 무기고 수비에 공이 컸던 혜희(惠熙), 이순신의 해군에 편입되어 작전을 편 의능(義能), 해전에 참여한 삼혜(三惠), 서산대사의 뒤를 이어 도총섭이 되었고 파사성(婆裟城)을 쌓았던 의엄(義嚴)도 유명한 스님으로 기록하고 있다. 충청도 부여 출신으로 의승을 모집하여 권율의 휘하에서 적을 맞아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한 설미(雪尾), 경상우도총섭이 되어 군량미의 자급자족을 위해 농사를 짓는 한편, 해인사에서 활과 화살·화약을 만들어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의승군에게 보급하고, 처음의 진주성싸움을 승리로 이끈 신열(信悅) 스님 등이 있다. 또 1605년(선조 38) 4월 임진왜란 때의 군공(軍功)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녹공이 있었다.



 



승군의 활약이 크자, 국가에서는 승군 동원을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1593년 8월에 도총섭 밑에 각 도마다 총섭 2명씩을 두게 하여 조직을 일원화하였다. 그렇지만 16총섭의 제도는 한정된 지역에서나마 실제로 선교양종이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양상을 나타내게 되었으므로, 각 도의 2명씩을 1명씩으로 줄였다가 적군이 북상할 기세를 보였던 1593년에는 경상도에 한해서 다시 2명을 두게 함으로써 유신들의 자가당착적인 정책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각성(覺性)과 명조(明照) 등의 의승군이 활약하였다. 각성은 1624년(인조 2) 팔도도총섭이 되어 남한산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였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3,000명의 의승을 모아 항마군이라 이름한 뒤 스스로 승대장이 되어 북상하였으나, 도중에 왕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을 중지하였다. 명조는 1627년 후금이 침략해 오자, 의승군 4,000명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진을 쳐서 크게 전공을 세웠고, 병자호란 때에는 군량미를 모아서 전선에 보내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사진2: 승군의 전투장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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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 주지 소임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표충사의 내력과 사명대사 더 나아가서 의승군을 비롯한 기타 자료를 섭렵하는 과정에서의 결론은 ‘표충사 춘추제향’을 국가제향으로 승격시켜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봉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약산인: 도원 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