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임진왜란과 포로송환

2020.11.27 표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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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포로송환



 



표충사에 온지 3개월여이지만, 아직은 사명대사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을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대강, 사명대사는 이런 분이고 표충사는 그 분의 영정을 모시고 봄가을 두 번 향사를 모신다는 정도이다. 사명대사는 조선 후기의 큰 스님이시면서 의승병 대장이셨다. 고향이 밀양이고, 풍천 임(任)씨 집안에서 태어나서 황악산 직지사로 출가하였는데, 주지까지 역임했다. 사명대사의 속명은 임응규(任應奎:1544~1610)였다.



 




사진1: 표충사에 모셔진 사명대사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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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지난 10월 2일 표충사에서 봉행된 춘계향사에 유림대표들도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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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는 자가 이환(離幻)이고, 호는 사명당(四溟堂)· 송운(松雲) 등이고 별호는 종봉(鍾峯)이다. 사명대사는 조부 슬하에서 7세 때부터 13세까지 《사략(史略)》을 배웠고, 《맹자》를 배웠다고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직지사로 출가하여 6년간 수행했으며, 승과(僧科)에 합격, 일찍부터 유생들과 교유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31세 때는 선종의 수사찰((首寺刹)이었던 봉은사 주지에 천거되었지만,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로 가서 당대 선교겸수의 고승이었던 휴정(서산대사) 문하에서 선리(禪理)를 참구했다고 한다. 보현사에 3년여 머무르다가 해인사에도 머물렀고, 팔공산 금강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주유하면서 두타행(참선)을 하던 중, 1586년 42세 경 옥천산 상동암에서 오도(悟道)하여 견성성불했다고 하며, 이후에는 오대산 영감사에서 보임하였다는 행장상의 기록이다. 이후에는 금강산 유점사로 거처를 옮겨서 수도하던 중, 1592년 48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고 한다. 이때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의 전초 구실을 담당하였다. 





사진3: 사명대사가 적진에 들어가서 네 차례나 만났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었던 일본의 장수이지 정치가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1562~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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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는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선조는 사명대사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으며, 그 뒤 전후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하였다고 한다.



1604년(선조 37)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때 잡혀 간 3,000여 명의 사람을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으로 들어가 비로소 스승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고 한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대강 정리해 본 사명대사의 행장이다. 주로 임진왜란에 주목했지만, 사실상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은 선승이었다. 다음 기회에 선승으로서의 사명대사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1604년(선조 37)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때 잡혀 간 3,000여 명의 사람을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으로 들어가 비로소 스승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고 한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대강 정리해 본 사명대사의 행장이다. 주로 임진왜란에 주목했지만, 사실상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은 선승이었다. 다음 기회에 선승으로서의 사명대사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사진4: 세계불교승가회 모임(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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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약산인: 도원 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