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신문] 표충사 주지 진각 스님 [21.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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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718회 작성일 21-06-16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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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부터 근대 관통한 ‘호국불교’ 대표성지 조성할 터”
‘초발심자경문’ 필사하다 “가서 공부해 보자” 출가
대강백 원산 스님이 은사 송광사 율원 졸업후 30안거
2019년 겨울 상월선원 결사 초발심 되새기며 혹한 견뎌
공사장 망치소리·트럭 소음 깨달음으로 가는 점철성금
2020년 표충사 주지 임명 부임 다음날 태풍에 큰 피해
표충사 쇄신시키란 뜻 삼고 보수 넘어선 대작불사 추진
도량정비 핵심 중 하나인 호국기념관 건립에 심혈
2020년 9월3일 새벽 2시 태풍 마이삭(MAYSAK)이 부산·경남에 상륙했다. 해발 1189m의 재약산(載藥山) 깊은 골짜기까지 휘몰아친 폭풍은 산사 일주문 앞 거목들의 뿌리를 뽑아내고는 전각, 삼문(三門), 담 등을 파훼시켜 갔다. 무자비한 바람에 도량 내 45개 건물 중 30여개가 대파됐다.
4일 오전 10시 대웅전 앞에 섰다. 전면에 보이는 범종루는 운판, 목어, 법고, 범종의 소리들을 삭이며 숨죽이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용마루에서 처마에 이르는 지붕 대부분이 파손돼 있었다. 작은 담과 함께 산내의 공간을 구분해 주었던 예제문(禮制門)과 자하문(紫霞門)도 엎어진 채 산산조각난 기와들과 함께 널브러졌다.
하여, 태풍 오기 직전인 2일 표충사 주지에 임명된 진각(眞覺) 스님이 마주한 건 고즈넉한 산사가 아니라 처참히 찢긴 도량이었다. 미어지는 가슴 움켜잡을 겨를도 없었다. 초토화된 도량을 다시 할퀴고 갈 또 하나의 태풍 하이센(HAISHEN)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월정사 말사인 강릉포교당을 2년쯤 다닐 무렵 불현듯 사념에 잠겼다. ‘내 인생과 장남의 삶!’ 같은 듯 다른 여정. 그 어느 길 하나 선뜻 잡히지 않았더랬다. 숙세의 인연이 닿았던 것일까? 출가 경험 있다는 도반에게 절집 생활 물으니 사미가 지켜야 할 덕목을 적은 기본지침서 ‘초발심자경문’을 건넸다. 한문본이었다.
‘명심보감’과 ‘채근담’을 익히 보아왔던 터라 옥편 찾아가며 행간을 짚어갔다. 책은 돌려줘야 했으므로 원효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지눌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야운의 ‘자경문(自警文)’ 원문을 노트에 옮겼다. 참 묘한 일이었다. 필사하는 내내 출세간의 끌림과 미지를 향한 떨림이 무한히 반복되는 듯했기 때문이다. 틈나는 대로 필사본을 보다가 알았다.
‘비구로 걷는 길도 가치 있구나! 가서 공부해 보자.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집을 나섰다. 어머니가 물었다.
“어디 가니?”
“돈 많이 벌어 오겠습니다!”
장남의 말을 어머니는 농으로 들었을 터다.
가족들이 쉬이 찾지 못할 곳으로 멀리 가야 했다. 어디로 가야하나?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거닐었던 통도사 숲속 솔밭길이 떠올랐다. 곧장 양산 영축산으로 향했다.
산사에 이르렀을 즈음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가게에 들러 국수 한 그릇 주문했다.
‘속가에서 먹는 마지막 음식이다!’
후루룩!
산문에 들어선 발길, 바윗덩이처럼 무거울 것만 같았다. 세연 끊기 여간 어려운 일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일주문으로 들어서니 깃털처럼 가벼웠다.
‘부처님께서 어서 오라 손짓하시는가 보다!’
개울에서 세수하고 머리도 감았다. 부처님 뵙기 전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해서였다.
은사는 백련암의 대강백 원산(圓山) 스님과 맺어졌다. 통도사 승가대학과 송광사 율원을 졸업하고 운문암 선원에서 수선안거한 이후 30안거를 성만했다.
‘하이센이 들이닥친다고?’
예보에 귀 기울인다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범종루 지붕에 머물렀던 시선을 거두어 그옆 우화루 너머의 산자락에 풀어 놓았다. 침묵이 흘렀다.
2019년 동안거. 산사가 아닌 허허벌판에 천막 하나 짓고 정진하려는 아홉 스님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천막법당 상월선원(霜月禪院)에 들기 직전 천명한 일언은 지금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여기 이 자리에서 내 몸은 말라버려도 좋다. 가죽과 뼈와 살이 녹아버려도 좋다. 어느 세상에서도 얻기 어려운 저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이 자리에서 죽어도 결코 일어서지 않으리라. 부처님 저희의 맹세가 헛되지 않다면, 이곳이 한국의 부다가야가 될 것입니다.”
처절하도록 간절한 발원이었다.
아홉 개의 텐트 앞에 아홉 스님이 가부좌를 틀었다. 강처럼 흐르는 깊고 긴 침묵 속에서 화두만이 달처럼 빛을 발했다. 2019년 11월11일 닫힌 문은 90일간의 정진을 끝으로 2020년 2월7일 열렸다. 10만여명의 대중이 상월선원 법당과 체험관을 찾아 아홉 스님을 응원하고 격려하며 함께 정진했다. 순수본연의 불교항로에서 벗어난 뱃머리를 돌려놓으려 한 이 결사는 한국불교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진각 스님도 그곳에서 입승을 보며 죽비를 들었다. 회향 소감으로 전한 일언은 지금도 생생하다.
“부처님과 옛 조사스님들께서 이 길을 가셨고 나도 그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공사장의 망치소리, 트럭소리도 내게는 화두라는 쇳덩이를 두드려 깨달음의 황금을 만드는 점철성금(點鐵成金)의 소리였습니다.”
대각을 향한 일념이 서있는 이상 걸릴 게 없다는 뜻일 터였다.
그때 농축된 경험이 지혜로 발현된 것일까! 우화루 너머의 산자락을 다 훑기도 전에 한 생각이 스쳐갔다.
‘행복과 불행은 함께 온다. 바람과 물이 휩쓸고 간 표충사를 쇄신시켜 보자! 그 불사하라고 부처님과 태풍이 나를 이곳으로 불렀구나!’
대웅전에서 내려와 주지실로 들어서서는 하이센을 기다렸다. 폭우를 동반한 태풍이 몰아쳤다. 급물살 탄 계곡물은 쩌렁쩌렁한 소리를 토해내며 내려갔다. 그 굉음 또한 원력과 신심을 다지게 하는 점철성금의 소리였음이다.
상월선원에서 혹한을 견뎌낸 원동력이 궁금했다.
“아홉 스님 모두 한국불교가 중흥되고 대한민국이 화합하며 온 세상이 평화롭게만 할 수 있다면 목숨이라도 바칠 각오가 돼 있었습니다. 그 의지가 하루하루를 견뎌내게 했습니다. 그게 없었더라면 제대로 씻지도 못한 아홉 사람이 내는 냄새만도 고통으로 다가왔을 터이니 혹한은 견뎌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겁니다.”
상월선원 정진 중이나 회향 직후 새긴 선·경구가 있었는지 여쭈었다.
“늘 기억했고, 늘 새겼습니다. ‘초발심자경문’의 한 대목입니다. ‘금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했는데 물 한 방울이라도 소화시키기 어렵지 않은가(今生未明心 滴水也難消). 조사관문 통과하지 못했는데 어찌 편안히 잠들겠는가(若未透祖關 如何安睡眠).’”
“자신의 본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 수행이라고 한 스님은 ‘일불(一佛)·일법(一法)·일승(一僧)’의 신행을 권했다.
“자신만의 원불(願佛)을 모셔야 합니다. 신심을 증득케도 하지만 세파에 크게 흔들린 자신을 잡아줍니다. 그 어떤 경전이든 하나만은 확실하게 잡고 있어야 합니다. 수지독송뿐 아니라 그 속에 함축된 의미들을 확실하게 꿰뚫으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염라대왕 앞에서도 설법할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세 번째 승(僧)은 승가를 넘어 수행단체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절, 사경, 염불, 참선 등의 어느 것이든 인연과 근기에 따라 선택해 일상에서도 매진하셔야 합니다. 이처럼 자신만의 삼보(三寶)를 갖추고 정진하다 보면 이 세계가 연기로 작동하는 세계임을 체득할 때를 맞이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 분들은 업력에 끌려가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원력의 삶을 영위합니다.”
긴급복구를 마쳤지만 서래각 단청 등의 도량정비 불사가 한창이다.
“보수를 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전각과 요사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세심한 손길이 필요해 철저히 살펴가며 작업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보수정비 불사를 넘어선 대작불사를 계획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금의 관음전은 뜯고, 명부전은 이전하려 합니다. 두 전각 자리에 대웅전을 신축할 계획입니다. 지금의 대웅전은 협소해 100명도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대웅전은 관음전으로 사용하려 합니다.”
표충사를 대표하는 시설 중 하나인 ‘호국박물관’ 신축도 대작불사 청사진에 그려져 있다. 사명대사와 관련된 16건 79점의 유물들과 국보 제75호 청동은입사향완 등을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 시설이 낙후됐습니다. 방습에 치명적 약점을 노출하고 있습니다. 방치하면 향완 보존도 담보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수장고의 취약성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새 박물관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의미 깊은 불사 하나를 전했다. 호국기념관 건립에 심혈을 기울일 것이라고 한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이 땅을 침탈하거나 평화를 깨려는 무리를 물리치는 데 늘 선봉에 섰습니다. 서산·사명대사가 대표적입니다. 용운·용성 스님의 여정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제강점기 1919년 3·1만세운동을 이끈 장본인도 스님들이었습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건 3·1운동 이후 불교계가 이끈 만세운동만도 14건이라는 사실입니다. 범어사, 통도사, 동화사, 대흥사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밀양 지역에서는 1919년 3월1일부터 4월10일까지 총 9회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다른 지역보다 많은 수치인데 그래서인지 밀양은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습니다. 이 만세운동의 중심에 표충사가 있습니다.”
학술적으로도 증명됐다. 통도사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한 것도 표충사 스님들이었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스님들은 이후에도 민족계몽과 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 가지 짚어야 할 게 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호국불교 진면목을 통시적으로 볼 수 있는 기념관이 우리나라에 하나라도 있습니까? 이 호국기념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일주문 앞에 세우고자 합니다.”
표충사를 호국불교의 성지로 조성하겠다는 원력을 피력하고 있음이다. 표충서원을 도량에 세우며 사명(寺名)도 ‘표충사(表忠寺)’로 바꾼 이 산사는 표충서원 관련 문헌자료도 다량 확보하고 있다. 서산·사명·기허대사를 추모하는 향사도 면면히 봉행해온 절이다. 신축 호국박물관과 호국기념관이 들어선다면 호국불교 대표 성지로 손꼽는데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향후 다양한 학술세미나를 기획해 좀 더 깊고 체계적인 연구성과들을 집대성할 계획입니다. 물론 이 불사는 표충사의 힘만으로는 회향할 수 없습니다. 본사인 통도사와 종단 중앙행정기관의 지원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최선을 다해보려고 합니다.”
표충사는 ‘영남의 알프스’라는 산줄기와 흑룡·층층폭포를 지나 가을이면 억새가 장관을 연출하는 사자평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산길도 품고 있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호국성지가 만나면 시너지 효과는 엄청날 게 분명하다. 표충사 또한 기존의 사격과는 전혀 다른 위상을 가질 것이다. 표충사 주지 진각 스님의 원력이 하루빨리 실현되어 가기를 기대한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진각 스님은
원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통도사 승가대학 대교과·송광사 율원을 졸업하고, 통도사 교무·기획국장, 봉은사 총무국장을 역임했다. 조계종 16대 중앙종회의원을 거쳐 17대 중앙종회 의원이다. 복지법인 봉은 상임이사, 서울지방경찰청 경승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