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충사 이야기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국가에서 명명한 절이다.

1926년

이보다 앞서 1715년(숙종 41)에 중건한 사실이 있으나 1926년에 응진전(應眞殿)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문화재 및 건물로는 국보 제75호인 청동함은향완(靑銅含銀香垸)을 비롯하여 보물 제467호의 삼층석탑이 있으며, 석등(石燈), 표충서원(表忠書院), 대광전(大光殿) 등의 지방문화재와 25동의 건물, 사명대사의 유물 300여 점이 보존되어 있다.

1839년

1839년(헌종 3) 사명대사의 법손(法孫)인 월파선사(月坡禪師)가 사명대사의 고향인 무안면(武安面)에 그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세워져 있던 표충사(表忠祠)를 이 절로 옮기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라 고치게 되었다.

1742년

1742년 동쪽 10리 되는 곳에 사명대사의 비석(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堂碑銘幷序)을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이렇게 모든 사우를 정비하여 다시 세웠기 때문에 중흥사(重興寺)라 하였다.

1738년

남붕(南鵬)이 크게 중창하고자 1738년(영조 14)에 사명대사의 행적(行蹟)을 갖추어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교지를 내려 표충사의 잡역(雜役)을 면제하고, 전답(田畓) 5결(結)을 내리고 경상도 관찰사에게 중수하도록 명하였다.

17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승려들이 흩어지고 폐허가 되었던 것을 1714년(숙종 40)에 밀양 군수 김창석(金昌錫)이 사명대사의 충훈을 알고 퇴폐된 것을 민망스럽게 여겨 지방유지와 승려를 불러 사우를 다시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

1286년

(충렬왕 12)에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一然) 국사가 1,000여 명의 승려를 모아 불법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829년

(흥덕왕 4)에 인도의 승려 황면선사(黃面禪師)가 현재의 자리에 중창하여 영정사(靈井寺)라 이름을 고치고 3층석탑을 세워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것으로 전한다.

654년

무열왕 원년(654년)에 삼국 통일을 기원하고자 원효스님이 터를 잡아 창건한 죽림정사(竹林精寺)를 신라 흥덕왕 4년때 인도스님이신 황면(黃面)선사가 현재의 자리에 재건하고 삼층석탑을 세워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영정사(靈井寺)로 개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