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분지 개간해 산나물 키우며 보릿고개 넘겼던 삶의 터전(울산신문, 202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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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회 작성일 24-12-2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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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전설따라] 사자평 화전민과 고사리분교
사자평은 재약산(수미봉) 동쪽의 광활한 고원지대로, 약 360만㎡(약 125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억새군락지로 유명하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4년(829년), 왕의 셋째 아들이 나병을 앓아 전국의 명산과 약수를 찾아 헤매다 이곳에서 영정약수(靈井藥水)를 마시고 치유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현재의 표충사 자리에 영정사(靈井寺)를 세웠고, 약초가 풍부한 산이라 하여 재약산(載葯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사자평은 신라시대 화랑들의 수련장으로,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훈련시키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이곳의 아름드리 소나무를 벌목하여 자국으로 가져가 절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 지역에는 도자기를 묻었다는 전설도 남아 있으며, 사기전과 도요지군 같은 지명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하늘아래 첫 동네 사자평(고사리마을)
사자평에 화전민이 모여들기 시작한 때는 한국전쟁이 끝난 1960년대 초였다. 전쟁의 상처가 곳곳에 잔재해 있던 그 시절, 게딱지만한 땅 한 뙈기 가질 수 없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였던 사람들, 탄광에서 막장을 하였던 사람들, 여기저기 공사판을 떠돌아다니며 막노동을 하며 문전걸식을 해야만 했던 사람들이었다. 가까운 산 아래 밀양 단장면 사람들이 맨 먼저 사자평을 찾아들었고, 이어서 배내골 사람들이, 나중엔 빚을 져 야반도주한 사람들을 비롯하여 각처 사람들 어중이떠중이까지 모여들었다.
이들 중 남의 눈에 잘 띄지 않게 하기위해서 움집(움막)을 지어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지금의 주암 쉼터 부근(주개덤)에 서너 집, 코끼리봉과 학암폭포 위쪽 중간지점인 칡밭에 넉 집, 또 사자평 목장이 있는 부근에 서너 집이 모여 살았다. 그들은 산비탈을 일구어 개간을 하고, 먹을 게 없어 굶기를 밥 먹듯 할 정도로 근근이 연명을 이어 갔다. 겨울을 나는 동안 피죽이나 갱죽(산나물 죽) 등을 먹으며 춘궁기(春窮期)를 보내야 했다. 오갈 데 없는 그들은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된 사자평에 감자, 당근, 옥수수 농사를 짓고, 약초재배를 하며, 염소도 키웠다. 그들은 작물이 필요한 거름을 구하기 위하여 일부러 억새밭에 불을 놓았다. 타고 남은 재는 이듬해 거름이 되어 풍성한 비비추와 곰치(곤달비), 감자, 고구마, 고사리를 길러냈다.
그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파는 일 또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서는 언양장(70리 길), 밀양장(70리 길), 팔풍장(40리 길), 동곡장(80리 길)을 머리에 이고 등짐을 해서 첫닭 우는 새벽별을 보고 갔다가 저녁별을 보고 돌아와야 하는 사지(死地)와 같은 곳이었다. 차마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살아가는 신세였다. 감자, 고구마, 당근 등은 무겁기만 했지, 시장에 가지고 가서 팔아봤자 몇 푼 안 되는 돈이었다. 겨우 생선 몇 마리, 소금 몇 되박을 살 수 있을 지경이었다.
5일 시장 중 물목이 다양하고 가장 큰 장은 언양장이었다. 언양장을 오갈 때는 그들은 주로 배내고개를 넘어 선짐이질등(등짐을 지고 선채로 쉰다는 고객 마루)으로 오르거나 거리 오담(간창, 하동, 지곡, 대문동, 방갓)에서 오두산(824m) 기슭을 감아 돌아 장구만디라 불리는 배내고개를 반드시 넘어야 하는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주로 이용해야만 했다. 이고, 지고 간 작물을 팔아 소금이며, 생선, 미역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사가지고 다시 갔던 길을 되돌아오면 죽기 살기로 걸어도 집에 도착하면 깜깜한 밤이 되었다. 산 짐승까지 우짖는 험악한 산길을 따라 넘어야만 했던 차마 죽지 못하여 사는 생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소쿠리와 같은 분지에 검은 흙이 가져다 준 땅
소쿠리와 같은 사자평 분지(해발 700~800m)는 강한 바람을 막아주어 화전을 일구기에 좋은 곳이었다. 또한 고산지대임에도 불구하고 농사에 반드시 필요한 물이 솟아나는 곳이 아홉 군데나 있었다. 봄철에 파종을 하거나 농작물을 심으면 땅심이 좋아 먹을 양식을 제외하고도 시장에 내다 팔수 있을 정도로 작황이 좋았다. 특히 감자나 당근, 도라지, 더덕, 참나물, 고사리, 곤달비, 약초 농사가 잘되었다. 당시, 사자평 산나물, 더덕은 부드럽고 더덕 자체의 약성이 많아 사자평 나물이 안 나오면 언양장 나물전이 형성되지 못했을 정도로 사자평의 산나물, 더덕, 도라지 등은 인기가 대단하였다고 한다. 특히 산나물은 표충사 스님들에게도 인기가 많아 스님들이 산나물들을 싹쓸이 해갈 정도로 소문이 나 있었다고 한다.
학교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산동초등학교 고사리분교
한때 암흑천지인 사자평 주변에도 여기저기 소문을 타고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코끼리봉 아래 칡밭과 주개덤, 수미봉 동남쪽, 사자봉 북동쪽아래, 범굴부근에 70~80여 가구가 대여섯집씩 5리, 10리 거리를 두고 마을을 이루고 살았을 정도로 검은(땅) 노다지라는 입소문이 났다고 한다. 사람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자연히 아이들도 하나둘 태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자녀들의 교육을 해결해야만 할 방안이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되었다. 마땅한 방법이 없어 당시 경남교육청에 오랜 민원을 제기한 끝에 1966년 2월29일 1개 학급 2명의 학생으로 '산동초등학교 사자평분실'로 개설은 되었지만, 아이들을 교육할 마땅한 시설이 없었다.
화전민이 쓰던 빈 흙집을 이용하기도 하였고, 사자평 한 모퉁이 바위에 개미딱지처럼 올라 앉아 선생님의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개교 2년만인 1968년 주민 50여명과 선생님에 의해 1,000여평의 학교부지가 조성이 되었고, 1969년 3월1일 사자평 분교로 승격되어 1970년 콘크리트 슬라브 교실이 신축되었다. 고사리분교는 1966년부터 30년동안 36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뒤 1996년 폐교되었다.
교통 불편·문명의 단절 못견뎌 하나둘 도시로
사자평은 신라시대는 화랑들의 수련장이기도 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려들을 모아 승병을 훈련시키던 장소였으며,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는 빨치산의 집결지이기도 했다. 또한 일제 강점기 때 천황산 요지(天皇山 窯址)는 백자를 굽던 곳이었으며, 광활한 초지에는 목장을 경영 하려는 사람들도 이곳을 찾아 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소, 염소를 방목하여 키웠다. 그러나 교통의 불편과 문명의 단절은 이들의 삶을 지속되게 하지 못했다. 견디지 못한 화전민들은 하나둘 이곳을 떠나 도시로 내려가게 되었다.
1980년 초 암흑의 땅이라 불리든 사자평에도 등산객의 발길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뒤늦게까지 이곳을 떠나지 못했던 화전민들과 후세들은 생계수단으로 등산객 상대로 술과 도토리묵, 파전, 산나물, 더덕, 구기자, 손 두부, 닭백숙, 하물며 흑염소까지 잡아 팔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유생들을 교육하고 성현들을 모시셔 제사하는 신성스러운 표충사(서원) 주산인 수미봉 사자평에서 가축을 도살한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도축한 핏물이 옥류동천을 따라 표충사를 감싸고 흘러 주변이 오염이 되자 땅 주인 표충사가 화전민들에게 철거를 요구하게 되었다. 당시 밀양 소재 사자평은 60만평 중 표충사 소유지는 약 11만여평이나 되었다. 30년 살던 화전민들은 생계의 터전이라 반발하여 7년여간의 긴 소송 끝에 패소를 하여 철거당했다. 당시 산동초등학교 고사리 분교도 1999년 표충사의 요구로 철거되었다.
사자평 한쪽에는 25년 전 고사리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마을이 있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고사리 마을 움막집에서 기울였던 막걸리 한잔의 추억과 찌그러진 창문 틈으로 쏟아지던 별빛과 서늘한 초승달의 기억이 선연하게 살아 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쓸쓸한 화전민들이 모여서 살던 이 고사리 마을에는 이제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 그 움막집들도, 몰려다니던 염소들도, 고사리라는 학교도, 이름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웠던 처녀 선생님도 이제 없다. 아이들이 뛰어놀았던 운동장에는 억새 무리 속에 당시 누가 심은 단풍나무 두 그루만이 낙엽을 떨군 채 홀로 쓸쓸히 서 있다.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